응? 그대는…… 정보조인 루나사 단원이지? 무슨 일이야?(황금빛 자수가 섬세하게 수놓아진 검은 드레스가 고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부드러운 미소가 주는 유순한 인상에 마음을 놓다가도, 새벽별을 닮은 눈동자가 고요히 빛나는 모습을 보면 어딘가 기묘한 기분이 든다.)
평소에는 울라와 이리아를 막론하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사냥도 하고 탐험도 하지만…… 딱히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다니는 건 아니라서, 여행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네. 그런 것치곤 들리는 마을에서 일거리를 종종 받기도 하지만…….에린을 돌아다니는 것이 피로할 때에는 티르 코네일에 머물러. 에린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계속 지내던 곳이라 익숙하거든.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있고 마을 사람들 농사를 도울 때도 있지. 농사를 돕고 나눠받는 수확물 양이 꽤 쏠쏠해.아발론에 들리면 특별조 훈련을 봐주거나 알터를 잠시 만나거나 해. 다른 조장들이랑도 만나면 인사하고 다른 사람도 가끔 봐.아르카나 협회가 생긴 뒤로는 왕성에도 자주 들리고 있어. 신생 협회라 그런지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좋던데.
그걸 왜 내게 물어? 루나사 단원인 그대가 더 잘 알면 알겠지, 물어볼 사람이 조금 잘못되지 않았나 싶어……. 솔직히 나는 그런 데에는 완전히 젬병이니까.아르카나 협회의 협회장께서 내 타라식 소시지 샌드위치를 맛보고 눈이 조금 커졌다는 것도 근처의 소식으로 쳐 주나?
정령 실체화 스킬을 알아? 무기를 사용하면서 모인 에너지를 바탕으로 정령 무기에 깃든 정령을 실체화하는 스킬인데, 이게 꽤 유용하거든.정령 실체화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이야기가 많지. 그대는 탈틴의 베이릭시드 씨가 최근 발표한 논문을 읽어본 적 있어?신수형 정령, 그러니까 흔히 펫이라고 부르는 존재 말이야. 이들이 인간형 정령 실체화에 비해 형체를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 신수형의 정령을 인간형의 모습으로 실체화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제언이야.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는 것도 좋겠네.하하, 응. 사실 맞아. 나와 함께 다니는 그 애 이야기야. 조장들에게나 얼핏 양해를 구했던 사안인데 그대도 알고 있구나. 정보조라 그런가? 베이릭시드 씨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지.정령의 실체화는 내가 블로니를…… 그 애를 부르고, 그 애가 나에게 답해주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이야기를 부러 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겠지만…… 내 모든 여정은 언제나 그 애와 함께하고 있어서, 굳이 비밀로 하고 싶지 않았어.
돈은 많아. 아르바이트는 심심풀이로 하는 거야.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르는 일은 잘 못해. 그래서 아르바이트 문화가 발달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특별히 자주 하는 아르바이트가 몇 가지 있지. 배달, 양털 채집, 가죽끈 제작하기, 주점 음악 연주, 세계 구하기, 감자 캐기, 사과 따오기……. 응? 이상한 게 들어있다고? 글쎄다.
수업 말이지…… 나, 사실 예전에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거든. 그런 것치고는 수업도 수련도 별로 하지 않고 실전형으로 성장한 편이기는 해.언제는 티르 코네일의 트레보 근처에서 한참 스킬을 수련한 적이 있어. 난 며칠에 걸쳐서 수련한 건데, 트레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스킬을 익힌다면서 문득 놀라더라고.다른 이들과 밀레시안의 시간 흐름 차이는 익히 알고 있어. 하나하나 신경 쓸 일도 아니지…….
영웅과 전설을 이야기하는 음유시인의 노래네. 사실, 영웅 이야기에 큰 관심은 없어. 본인이 영웅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그런가?사람들이 가벼운 흥밋거리로 떠드는 명성에 별다른 감흥이 들 리가. 하지만 그 가벼운 명성 덕분에 알터를 만났으니 사실 불만 또한 없단다. 어쨌거나 그 애를 만났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해.
나, 아주 오래 전에는 섬마을에 살았었어. 또래가 별로 없는 작은 마을이었지. 평생 바다를 끼고 살아와서 그런지 죽은 뒤에도 묘지에 묻히는 대신 바다에 뿌려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어. 나도 어렴풋이 그랬던 것 같아. 그땐 죽음이 뭔지도 잘 몰랐는데 말이지.어떻게 보면 그 소망이 이뤄진 것이기는 하네. 그 곳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물놀이하기에 좋던, 한여름 볕 아래 바다였으니까…….별 얘기를 다 하네. 그냥 그랬다는 이야기야. 바다가 한동안 불편할 때도 있기야 했지만은 지금이야 별 일 다 겪었는데 뭐 새삼스럽지.
글쎄? 그 사람에게 한때는 마음이 흔들렸던 적도 있던 것 같아. 알잖아. 그렇게 순수한 연정이라는 건 귀하고 특별하니까.하지만 역시, 그 고생을 하고서 처음 뵙겠다는 말을 들으니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이리아 대륙을 돌아다니다 보면 엘프와 자이언트를 종종 만나. 서로를 많이들 싫어하지.언젠가 아주 형편없는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엘프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사람 아버지도 그 남자를 굉장히 형편 없다고 평가하고는 그 남자와 결혼을 하느니 자이언트와 결혼을 하라고 화를 냈다 하더라.그녀는 결국 결혼을 해서 그 남자와 여행을 떠났어. 나중에 여행을 하다 만난 엘프에게 그녀 소식을 물으려고 이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얼마나 형편 없는 남자였던 거냐며 질색을 하던데.아직 다시 만난 적은 없어. 필리아에 갈 때마다 어쩌면 잠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집에 꼭 들려보는데, 얼굴 한 번을 보여주질 않더라고…….
순수하게 넘쳐흐르는 호의와 친애를 당연하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나도 그랬을 뿐이야.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인정하지 않기가 더 힘들더라.그 애를 향한 내 친애가 다른 이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하다고 하고 싶지 않아. 그 애는 응당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고, 처지가 있고 신분이 있는 만큼 그 애가 한곳에 묶일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으니까.내게 아프지 말라고 해주었으니, 나도 오롯이 그 애의 평안과 행복을 바랄 뿐이야…….무수한 시간이 흐른대도…… 언젠가 그 애를 만나지 못하게 되어도, 평생을 친애하겠지.그 애가 언젠가 그걸 무겁게 느끼지만 않으면 기쁠 텐데.
나는…… 그 남자에게서 만약의 세계에서의 나를 봤어. 그래서 이해와 동질감을 지닌 채, 내가 직접…….(이 주제로는 더 대화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지나간 일에 매달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 그가 또 나타날 일은 없을 거야. 만약 그게 걱정이라면 안심해도 괜찮아.(여전히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호박빛 눈동자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이 주제로는 더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에린에 처음 왔을 때는 나도 참 미숙했지. 고작 마을 입구의 늑대 무리가 두려워 티르 코네일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면 나를 부르던 여신의 목소리도 한 때의 꿈으로만 남았을 거야.하지만 나는 물망초가 잘 어울리는 그 애와 만났어. 이 애와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했지. 이 애가 나와 함께해준다면, 앞으로 어떠한 고난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이 여행을 후회하지 않겠다고도.그 애의 기억은 이제 흐려지거나 빛바래지 않을 거야. 내 모든 여정에는 그 애가 함께하고 있었고, 이제는 더욱 가까운 위치에서 동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그 애와 나의 추억담은 언제까지고 이어지겠지.내가…… 그 애에게 유일하고, 다시 없을 존재로 기억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아. 나에게 그 애도 유일무이한 존재니까.영원을 함께할 내 첫사랑이야.